오래전 기업 간부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강의 중간에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가장 영향을 준 존재는 누구(무엇)입니까?’라는 설문지를 돌렸습니다. 큰 기업의 간부라면 대체로 성공한 사람들일 겁니다. 대부분이 스승이나 좌우명과도 같은 경전 구절을 쓸 거라고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빗나갔습니다. 대부분이 ‘어머니’라고 썼거든요.「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에 나오는 M. 아담스의 글이 기억납니다.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데, 어린 아들이 오더니 엄마에게 자기가 쓴 글을 내밀었습니다. ‘잔디 깎은
박노해 시인은 ‘너의 하늘을 보아’라는 시에서 슬픔과 고통 속에서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위로해 줍니다."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늘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저는 ‘살아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꿈은 도달해야 할 목표입
누구나 성공을 원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노력이 부족해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중 하나는 고정관념에서 갇혀 발상의 전환을 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학창시절 저는 영국 출판사인 ‘펭귄북스’의 책들을 읽곤 했는데, 문고판인 이 책들은 값이 저렴했고 크기도 작아 가벼워서 들고 다니기에 수월한 책들로 기억합니다. 대형 출판사들이 즐비한 당시 상황에서 펭귄북스는 어떻게 성공했을까요?「세상에서 가장 멋진 지혜 이야기」(치우칭지엔과 황쉬에리)에 펭귄북스 이야기가 실려 있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지만 살아가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종종 느낍니다. 시시비비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인데, 자칫 서로의 감정을 다치게 해 관계가 틀어지고 급기야는 깊은 갈등과 분열로 치닫곤 합니다.지인이 보내 준 글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았습니다.옛날 어느 고을에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고집 센 사람이 ‘4×7=27’이라고 주장하자 똑똑한 사람은 ‘28’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자
베토벤 하면 ‘영웅’이나 ‘운명’ 같은 장엄한 느낌이 드는 곡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의 사후에 발견한 ‘엘리제를 위하여’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입니다. 부드럽고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듭니다. 그 곡에 어떤 이야기가 숨었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행」(김하)에 이와 관련된 글이 있습니다.이 곡의 원제는 ‘바가텔’이고, 그 표제 밑에 ‘4월 27일, 엘리제의 추억을 위하여, 베토벤 지음’이란 주가 붙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제는 누굴까? 그녀는 그가 사랑했던 ‘테레제’라고 합니다.백작의 딸인 그녀는 그에게
사람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을 흔히 듣곤 합니다. 마음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이기심’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고,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인 ‘이타심’으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존재들까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마음입니다.사람들은 누구나 이기심과 이타심 모두를 가지고 있으며 상황과 상대에 따라 둘 중 어느 하나를 꺼내 씁니다. 두 마음 모두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마음입니다. 건강한 이기심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로마 고유의 신(神) ‘야누스’는 출입문의 수호신으로, 머리 앞뒤에 얼굴이 있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의 의미를 후세 사람들은 다양하게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는 ‘시간’ 개념으로 해석해 ‘과거’와 ‘미래’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에 너무 매달려서도 안 되고, 동시에 너무 앞만 보고 달려서도 안 된다는 지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쪽에만 매몰되지 말고 앞뒤를 살펴 균형적인 삶을 살라는 뜻이지요.삶은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영글어 갑니다. 그런데 야누스 신화에서 알듯이 앞만 보고 달리는 ‘나’와 뒤를 돌아보는 ‘나
"맑았던 호수가 장맛비에 온통 흙탕물로 변해 버렸습니다. 호수 위에는 온갖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어 예전의 맑은 모습을 찾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가느다랗게 솟아나는 물줄기에 의해 점차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실처럼 가느다란 보잘것없는 샘물이 넓은 호수를 맑게 하고 있었던 겁니다." 혼탁하고 시끄러운 세상입니다. 마치 상대를 노려보고 으르렁대는 동물의 세계와도 같은 모습이 뉴스를 채우고, 그 모습이 마치 장맛비에 흙탕물로 범벅이 된 호수의 모습과도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다
타고난 천성이 외향적인 아이도 있고 내향적인 아이도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어릴 적 성정은 내향적이었나 봅니다. 그의 책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합니다."어릴 때 외갓집 툇마루 끝에 앉아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서 별의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곤 했다. 굼벵이는 왜 썩은 초가지붕 속에 웅크리고 사는지, 매미는 왜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울어대는지, 장마철 산에 나는 버섯은 왜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것일수록 화려한 빛깔을 띠는지. (…) 나는 지금 외로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
"나이가 들수록 젊어질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나이는 ‘신체 나이’와 ‘정신 나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체 나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정신 나이만큼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사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젊어질 수 있습니다.늙음과 젊음의 차이는 바로 ‘호기심’입니다. 어린아이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고, 그 행동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갑니다. 이런 태도가 아이를 성장시킵니다. 그러나 어른의 경우는 이미 많은 것을 안다고 믿고 있어서, 또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며 새로운 것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때로 버겁기만 합니다. 때로는 의도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때로는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때로는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아서, 때로는 과음한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거나 승승장구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이런 일을 겪을 때면 언젠가 읽었던 글 중에 "하루만 사는 하루살이가 세상에 나왔더니 마침 그날이 장마철이라 하루 종일 장대비가 오더라"라는 글귀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 글귀에서 시선을 멈추고 ‘만약 내가 저 하루살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정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애정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화의 감정’입니다. 애정의 감정으로 대하면 즐거운 기분이 들고, 그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생깁니다. 마치 아름다운 꽃을 봤을 때 드는 감정과도 같습니다. 이때는 행동을 신중히 하게 되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다룹니다. 애정의 감정은 이렇게 대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대상과 나를 하나가 되게 합니다.그러나 화의 감정으로 대할 때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산책 중 지렁이가 보입니다. 즉시 징그럽다는 느낌이 들고, 재빨리 그곳을 피해 지나갑니다. 이처럼 화
옛 친구들과 모처럼 즐거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던진 이야기 중에서 어딘가에서 읽은 글이라며 전한 한 친구의 이야기가 유독 제 가슴에 깊이 담겼습니다.초보 운전자인 아내가 서툰 운전 탓에 앞차의 범퍼를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새 차를 산 날 남편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사고는 언제든 날 수 있어요. 만약 사고가 나면 조수석 서랍에 편지를 넣어두었으니 그걸 읽어봐요."아내는 편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이내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합니다. 메모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 세상에는 단지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원하는 것이 ‘없어도’ 비극이고, 원하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어도’ 비극이라니요? ‘없으면’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눈이 멀게 되고, ‘있으면’ 더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눈이 가려져 비극이라는 말은 아닐까요. 이 해석대로라면 바로 나의 ‘탐욕’이 비극의 씨앗인 셈입니다. ‘탐욕’이라는 낱말은 대개 부정적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탐욕스러운
동료들에게 늘 따돌림을 당해 실의에 빠진 제자가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동료들이 저를 따돌리는데, 아무래도 저는 비천한 존재인 모양입니다. 죽고 싶습니다."조용히 듣던 스승은 벽장 속에서 자그마한 돌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 돌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시장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시장에 도착한 제자가 채소 장수에게 물었더니, 돌을 보자마자 그는 "이따위 돌덩이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래? 나 같으면 버리겠어"라고 했고, 정육점 주인은 "보통 돌은 아닌 듯하군. 내가 돼지고기 두
뉴스를 틀면 온통 갈등과 다툼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게 맞는 것 같다가도 저 사람 말을 들으면 그것 역시 맞는 것도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뉴스에 나올 만한 사람이라면 ‘힘’깨나 쓰는 강자들이 대부분일 텐데 왜 그리도 다툼만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실 그 ‘힘’은 국민이 그들에게 위임한 자리에서 나오는 힘이고, 그 힘을 활용해 국민 모두를 위해 일하라는 국민의 준엄한 메시지일 겁니다.그들의 다툼과 갈등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지인이 보내준 한 편의 유머가 기억납니다. 버스 기사분과 거친 승
‘죽음’과 ‘구사일생’이란 이름의 저승사자 두 명의 이야기가 「나는 너다」(정채봉)에 나옵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은 저승사자는 ‘죽음’이지만, ‘구사일생’은 글자 그대로 사람을 살려 줍니다.잠시 후 ‘꽝’ 소리와 함께 큰 사고가 났습니다. 1분 먼저 가려던 세 명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과연 이 세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두 사람은 저승으로 갔지만 다른 한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살아납니다. 사고 현장에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저자의 이야기 속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가 가벼운 깃털 하나 때문에 주저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등에 짐을 가득 싣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등에 하나씩 하나씩 짐이 더 얹힙니다.힘겹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샘물을 떠올리며 뚜벅뚜벅 걸어가지만, 어느 순간 더는 걸을 힘도 남지 않아 주저앉고만 싶습니다. 그래도 걸었습니다. 그때 깃털 하나가 날아와 등에 내려앉습니다. 이때 낙타는 결국 주저앉습니다. 샘물까지 얼마 남지 않은 그곳에서 그만 포기한 겁니다.지극히 가벼운 깃털 하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낙타를 상상하면서 요즘 수재와 산사태로 절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또 하나를 더 갖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일 테니까요. 그렇게도 소망했던 하나를 얻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 집착하며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는 ‘디드로 효과’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다음 백과’에 따르면 디드로는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세련된 빨간 가운과 자신의 낡은 물건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가운과 잘 어울리도록 책상과 의자 등을 빨강 계열의 새것으로 바꾸다가 마침내 벽걸이 등 모든 가구를 바꿨습니다
사람과 갈등은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만약 갈등이 깊어지기 전에 진솔한 대화가 이뤄졌다면 아마 달라졌겠지요. 대화도 없이 상대 행동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사실’이라고 믿어 버릴 때마다 갈등의 골은 더더욱 깊어만 가겠지요. 이런 일과 관련된 적절한 예화가 「엉뚱한 수다」(앤소니 드 멜로)에 나옵니다.중세시대, 교황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기 위해 추방령을 공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재고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교황은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교황 자신과 무언(無言)으로 성경 이론에 대해 논쟁할 사람을 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