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그리고 좌절 패망을 목전에 둔 일본인들은 소련군에 협조한다는 이유를 들어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에서 한인 17명을 학살하고, 미즈호(현 포자르스코예)에서 여성 3명과 6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한인 27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즈호 학살사건은 소련 당국이 조사해 사건의 전모와 살해 가담자들을 밝혀내 7명은 사형을, 11명은 10년형을 선고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위령비를 건립해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1945년 8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한 한인들은 귀국의 희망을 품고 사할린 가장 남쪽의 코르사코프항구로 ...
송나라의 문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 사신으로 고려 개경으로 향하다 잠시 머문 섬을 "제비가 많이 날아다녀 자연도(紫燕島)라 불린다"고 기록했다. 그때 서긍이 방문한 섬이 바로 인천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다. 지금은 900여 년 전 하늘 위로 날아다녔던 제비 대신 하루 수백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고 있다. 오늘날 영종도는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국내외를 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러야만 하는 곳이지만, 과거에도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중국을 왕래하거나 서해바다를 오르내리자면 꼭 거쳐야만 하는 장소였다. # 사신들이 머물렀던 ...
인천 사람들에게 있어 ‘주안’은 주안역을 기준으로 그 주변 일대를 가리킨다.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남구에 속하며, 주안1동에서 8동까지 8개의 행정동에서 ‘주안’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주안동의 전체 면적은 6.18㎢로 동구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15만6천233명으로 강화군, 옹진군, 중구, 동구보다 많다. 대부분의 지명은 그 공간에 살고 있거나 지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또 사용되고 있다. ‘주안’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여서 인천 사람들은 이곳이 애초부터 주안이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한국이민사박물관(인천시립박물관 분관)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에게 어려운 난제 중 하나가 사할린 한인들의 이주역사였다. 한민족의 이주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사할린 한인의 이주역사를 러시아지역 또는 일본지역에 포함해야할지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다. 700만이 넘는 재외동포들 중에서 모국으로의 귀국을 가장 열망하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들의 이주역사의 독특함을 들어 별도의 이주역사로 기술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2015년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조국이 광복을 맞이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자신들의 국적인 러시아와 모국이 수교를 맺은...
하와이로 출발하기 위해 제물포에 모인 이민자들은 배에 오르기 전까지 무엇을 했을까? 이들은 근대도시 인천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권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렌미국공사가 고종황제에게 하와이 이민을 진언하고 7개월 후인 1902년 11월 15일 하와이 이민 모집과 송출사업의 전권을 미국인 데쉴러에게 부여한다는 임명장이 수여됐고, 다음날에는 수학 유람 및 농공상업으로 외국에 여행하는 백성에게 여권의 발급업무를 담당하는 유민원(綏民院)을 궁내부 산하에 신설하라는 칙령이 내...
내달 문학산 정상이 50년 만에 시민에게 개방된다. 인천 지역사회는 벌써 기대에 부푼 분위기다. 해발 200m가 조금 넘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을 이처럼 반기는 까닭은 문학산이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산은 1883년 개항되기 이전까지 인천의 중심지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던 곳이다. 그동안 문학산은 지역의 상징이면서 일명 ‘배꼽산’이라고도 불리 울 만큼 인천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다. # 인천의 중심, 문학산 오늘날 인천은 지리적으로 도서해안과 내륙으로 구분되며, 이 중에 내륙지역은 한남정맥(漢南...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송도’에 가자고 하면 기사님의 반응은 한결같다. "구 송도인가요? 송도 신도시인가요?" 송도 신도시에 가려면 수인선 송도역에서 내려야 하냐며 묻는 서울 친구들도 있고, 송도시장과 송도초등학교는 당연히 송도신도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혼란은 인천에 두 군데의 송도가 있기 때문이다. 인천 사람들에게 송도라 함은 연수구 옥련동 일대 이른바 구 송도라 불리는 곳과 연수구 송도동 일대의 송도신도시를 말한다. 송도라는 이름을 우리말로 풀면 ‘솔섬’으로 아마도 소나무가 많이 분포하고 있어 붙여진 ...
몇 해 전 봄, 중구 개항장에 위치한 청일조계지경계 계단에서 남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공터에 상가 건물을 짓는 공사가 시작됐다.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될 무렵 구청 문화재 담당 직원과 관계 전문가들의 눈에 붉은 벽돌이 희미하게 드러난 모습이 들어왔다. 공사는 곧바로 중지되었고 그해 여름 정식으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조사를 마치자 남북 16.6m, 동서 13.7m 규모의 벽돌로 만든 건물의 뼈대가 드러났다. 그동안 기록과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한국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과 인천에서 가장 큰 중국 요릿집이었던 중화루가 완전하지...
요즘처럼 더위에 지쳐 잠들기 힘든 밤이면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맥주 한잔이 그리워진다. 지난밤, 아사히(朝日, アサヒ)맥주를 마시면서 문득 근대기 인천에 있었던 양조장, 조일양조주식회사(朝日釀造株式會社)와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주종은 다르지만, 아사히맥주의 원류를 인천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라는 엉뚱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회사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아사히맥주주식회사는 1949년 대일본 맥주 주식회사에서 분할된 기업으로 1919년 인천에서 창업한 조일양조주식회사와는 무관하다. ‘아침 해’라는 뜻인 조일(朝...
사이다. 지금은 누구나 마실 수 있는 보편적인 음료이지만, 산골 마을 소녀였던 나에게는 달콤하고 톡 쏘는 신기한 그 맛을 경험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면 김밥 또는 삶은 달걀과 함께 세트로 마셨던 추억의 음료였다. 속이 더부룩할 때면 시원스레 터져 나오는 트림과 함께 뱃속을 편안케 해주던 소화제이기도 했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라는 노래가 있다. 재미 삼아 들었던 노래지만, 들을 때마다 왜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다는 표현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앞뒤의 가사를 보면 그다지 의미 있는 내용은...
인천 사람들에게 월미도는 낭만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항구도시이지만 바다를 접하기 어려운 인천에서 그나마 바닷냄새를 만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밤이면 제방을 따라 늘어선 상점들의 불빛과 쉬지 않고 돌아가는 놀이기구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또 한편으로 월미도는 아픔의 공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근대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우리의 뜻에 반하는 조차 경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정부의 주도로 진행된 공식 이민은 1902년에서야 비롯됐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하기 위해 121명이 1902년 12월 22일 월미도 해상에 떠 있는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나가사키를 거쳐 겔릭호(Gaelic)로 갈아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입국했다. 이것이 바로
인천시립박물관 뒷마당에는 쇠로 만든 중국 종(鐘) 3점이 나란히 서 있다. 오래전 부평조병창에서 가져온 이 종을 보고 왜 한국 박물관에 남의 나라 종을 전시해 놓았느냐며 질책하듯이 말을 하고 가는 관람객도 가끔 있다. 사실 외국의 종이 우리나라 박물관 전시장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낯익은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종은 그냥 다른 나라에서
대학원 시절 왕복 4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통학거리 탓에 1년 넘게 자취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 학교 후문 주변에 방을 얻는 것이 월세도 싸고 다니기 편했겠지만, 졸업 논문을 써야하는 입장에서 산만한 주변 환경이 문제였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토지금고(인천시 남구 용현5동)’라는 동네였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고, 조용한 주택가
# 굴곡 많은 고려극장의 끈질긴 여정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극장은 193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설된 ‘원동변강조선극장’이다. 타향살이에 지친 동포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안식을 느끼게 해 준 원동변강조선극장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김진, 리장송, 최봉도, 리경희, 리함덕, 김 블라지미르, 최 따찌야나 등과 같은 출중한 배우
“섬을 둘러 모두 바다다. 서쪽과 남쪽은 넓고 물가가 없으며 오직 동쪽과 북쪽의 두 나루 사이가 그다지 넓지 않지만 물살이 세고 암초가 있기 때문에 조수를 살피고 건너야 한다. 그러므로 오랑캐를 방어하기에 적합하다.”인천 소암마을 출신으로 조선시대 문신인 이형상이 지은 「강도지」의 서문(序文) 가운데 강화도의 입지를 묘사한 내용이다.
이민자로서 타국에서의 삶은 매우 고단한 것이다. 현지에서의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이 주는 어려움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민족문화에 대한 향수가 커져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지친 생의 여정에 몸에 맞는 옷, 맛있는 음식, 따뜻한 집이 돼 지친 삶을 달래주는 한 줄기 빛으로 역할해 온 곳이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극장인 고려극장이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36년에 걸친 일제 식민통치가 막을 내린 지 불과 7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고, 게다가 미 군정체제 아래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기관이나 시설에 앞서 박물관을 우선적으로 개관했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나
19세기의 조선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 점차 심화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우리의 땅에서 벌어진 전투였던 청일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느덧 120년이 지나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반도를 두고 벌였던 청일전쟁은 역사로 남았지만 그 흔적은 당시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역사지만 현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기에 그 의미를 되새
숭의로터리는 인천에 몇 남지 않은 로터리로 중앙의 분수대를 중심으로 6방향으로 도로가 뻗어 있다. 부평역의 북쪽에도 이 같은 로터리가 있었지만 1980년대 말 사거리로 바뀌었다. 숭의로터리에서 뻗은 길은 다른 길들과 만나 교차로를 이루며 그물망 같은 가로가 형성된다. 숭의동과 용현동에 걸쳐 형성된 가로망이 계획된 것은 1937년의 일로 이미 78년 전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