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경인철도 개통 이후 1904년 경부선이 완공되고, 1906년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부설됐다. 그리고 호남선은 서울∼목포 간 경목선으로 1911년 착공해 1914년 완전 개통했고, 경원선은 서울∼원산∼경흥(웅기)의 선로 1910년 착공해 1914년 완전 개통함으로써 한반도를 十자형으로 관통하는 철도망을 완성했다.한일합병을 전후해 일제가 조선에서의 철도를 시급히 부설해야 했던 이유는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차원과 식민지 경제 수탈이 전제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조선을 식민지한 이후 조선총독부는 물자의 원활한 수송
인천 역사에 남은 기록과 터를 포함한 여성인물 관련 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쉽게 인천시 각 구(區)의 연원적 공통분모를 찾아 ‘문학산권’, ‘개항장권’, ‘계양산권’ 그리고 ‘강화·옹진권’ 4개 권역(圈域)으로 구분하고 정리해 봄으로써 인천 역사 속 여성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번 기고(寄稿)에서 전근대 인천 역사의 출발지인 미추홀구와 여기서 분구(分區)됐던 연수구, 남동구를 ‘문학산권’으로 분류하고, 이 공간에 남은 여성인물 관련 대표 문화유산으로 인천도호부와 정희왕후 그리고 이윤생·강씨정려각을 살펴본 바 있다.‘문학산권’에서
1881년 2월 28일, 그간 인천 개항을 둘러싸고 첨예했던 줄다리기가 앞으로 20개월 후 개항하는 것으로 최종 타결됐다. 일본이 인천을 개항하자고 제안한 때가 1879년 6월인 것을 감안하면 1년 8개월 만에 결과였다. 그러나 인천을 개항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알려지자 인천 개항을 반대하는 유림(儒林)들이 목소리가 거세지더니, 3월 25일 이른바 영남만인소를 필두로 하는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개됐다. 이에 정부는 회유책을 펼치면서도 유배와 참형 등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제압했다.이와 비슷한 시기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됐던
2천40여 년의 오랜 인천 역사 속에 남겨진 다양한 문화유산 가운데 특히 여성과 관련된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것도 ‘인천 여성사(史)’를 정립해 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 뜻에서 지면을 통해 몇 차례 연속으로 인천의 여성문화유산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현재 인천 역사에 남은 기록과 터 등을 포함한 여성인물 관련 문화유산은 대략 34점으로 파악된다. 이들 중 지정된 문화유산은 8점, 비지정문화유산은 26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인천시 각 구(區)의 연원적 공통분모를 찾아 ‘문학산권’, ‘개항장권’, ‘계양산권’, ‘강화·옹진권’
16세기 이래 지리상 발견은 바다에서 시작했다. 이른바 서세동점은 정치·경제·종교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진행됐지만 그 본질은 식민지 건설을 위한 진출이었다. 동아시아 3국에서 개항이 그토록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은 3국이 모두 쇄국 상태로 문호를 닫고 있었기 때문이며, 중국-일본-조선 순서로 이뤄진 것은 지리적 위치에도 원인이 있으나 그보다도 서양과 가져왔던 접촉 기회와 깊이 순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각국 개항은 당시 세계사 추세로 보면 결국 조만간에 필연적으로 닥쳐올 현상이었으며,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어차피 이뤄질 수밖
인천은 1883년 제물포 개항으로 다양한 서구 근대 문물의 출입 통로가 됐다. 140년 전 그 역사적 자취들이 모티브가 돼 오늘날 중구 개항장의 주요 콘텐츠가 구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관광지 구실을 한다. 그런 까닭에 일제강점기 이전, 특히 개항 후 20여 년 동안의 조선은 물론 청국, 일본, 서구 각국인들이 생활했던 터전으로서 국제도시 개항장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주제 중 하나다.그런 관점에서 각국거류지였던 송학동 3가 일대는 1910~1911년 진행된 토지조사부를 보면 획정된 7개 지번이 다양한 역사적 이력을 남긴다.
1876년 일명 강화도조약이라 불리는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부산항 외에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 중에서 2개 항을 추가 개항하는 내용으로 협약했다. 그래서 1880년 5월 1일 러시아의 남하를 방지하고 함흥평야 일대의 미곡을 수출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원산항을 개항했다. 반면 나머지 한 개 서해안 항구의 개항은 차일피일 늦어졌다. 그 연유는 우리 측 저항도 있었지만 일본이 아직 서해안 개항지에 대한 정확한 해도와 접안시설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인천 개항은 1879년 6월부터 일본에 의해 거론·제시되기 시
인천 제물포 해안의 변화와 공간 확장은 1883년 개항 이후 열강에 의해 설정된 조계지와 해안의 공유수면 매립에 의해 주로 이뤄졌다. 특히 일본은 1879년 6월 인천을 개항지로 결정하면서 그 준비를 위해 가장 먼저 상륙해 해안선에 제방을 쌓고 돌과 흙으로 성토해 평탄지를 만들어 선착장, 부두, 도로시설과 택지 조성을 계획했다. 그리고 1882년(12월 24일) 9개 도면을 포함, 총 22쪽으로 구성된 ‘제물포축항목적서(築港目的書)’를 통해 해안 매립을 기획했다. 그 내용은 ‘제물포 재형도(在形圖)’, ‘제물포 시가할지도(市街割之圖
인천을 대표하는 또 다른 지명으로 제물포를 모르는 이는 없다. 인천이 개항한 이래 제물포는 항구로서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자리잡았고, 그런 연유로 해방 이후에는 잠시나마 인천을 제물포시로 변경 시행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제물’이란 명칭이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았다. 단지 그 유래에 대해 ‘제물’을 ‘제수(濟水)’로 의역해 곧 ‘물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지 않으면 갯벌에 배가 얹
인천 근대 상설 시장의 출발인 신포시장이 중국인들의 푸성귀전과 정흥택의 어시장으로부터 오늘날 신포국제시장으로 이어졌던 내력은 중구 개항장을 여행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제 익숙하다. 최근에는 칼국수골목으로 불리는 신포동 61번지에 남았던 1942년 건립한 상가주택을 리모델링하고 그 옆 47번지 일원을 단장해 주민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새로운 이력이 더해졌다. 이 상가주택 토지를 소유했던 인물 중에는 41번지, 지금의 롤링파스타 가게 자리에 어시장을 개설했던 정흥택의 둘째 동생 순택이 있다. 당시 그는 어시장 맞은편 내동 112번지
인천은 기원전 5천 년께부터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지역 곳곳에서 구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이들의 사회·문화적 유산은 신석기·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확장돼 갔다. 한반도 남부의 정치적 집단의 존재는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194년 고조선 준왕의 남하에서 한왕(韓王)이 됐다는 기록에서 일차적으로 그 근거를 찾는다. 이어 삼한시대 마한(馬韓)지역의 54國을 거쳐 기원전 18년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과 하남 위례에서 나라를 열면서 백제가 출범했다. 비류가 정착한 이곳은 본래 마한에 속했던 ‘목지국
2023년 인천은 재외동포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지역 미래 발전을 지향하고, 그 적극적 방법의 일환으로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어느 때보다 재외동포들과의 교감, 인천시민의 독려와 협조 그리고 정부의 통찰력이 절실한 시점이다.인천에 ‘재외동포청’이 자리해야 하는 이유와 명분은 다양하다. 입지적으로는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이 있어 이동과 접근의 편리함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공식적인 근대 최초 해외 이민의 귀착지 하와이 교포들의 후원으로 이민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워진 ‘인하공과대학’, 여기에 하와이 이민 1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인 로제타 홀(1865~1951)은 1890년 우리나라로 건너와 반평생인 43년간 활동하며 맹아(盲啞)학교와 의학·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점자 도입과 한글용 점자 개발에 힘썼으며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점동(박에스더) 등 의료인 양성에 헌신한 여성이다.특히 1894년 평양에서 시각장애를 앓던 오봉래에게 점자를 가르친 것이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초가 됐다. 1897년 제작된 ‘로제타 홀 한글점자 교재(4점식)’는 기름을 먹인 두꺼운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만들었는데, 1926년 송암 박두성이 6점식 점자에 기
1876년 개항 이후 부산·원산 두 곳의 개항장에는 외국 상품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관세를 담당하는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바 무관세 무역(無關稅貿易)이 강요돼 외국과의 통상에 상응하는 재정적 실익은 담보되지 못했다. 1881년 조선은 해관(海關, 세관)을 설립하고자 청국에 청국인 파견을 요청했으나 청국 최고의 실권자로 톈진에 있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서양인 고문 고용을 권고했고, 그의 막료에서 업무를 수행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를 추천했다. 당시 묄렌도르프를 맞이하기 위해 현직 병조판서 조영하가 톈진으로
우리나라에 여성과 어린이 분야만을 별도로 전담하던 ‘여자경찰서’가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다. 처음 등장한 것은 1946년 5월 여순경이 철도역에 배치되면서였고, 이듬해 5월 서울·부산·대구·인천에 여자경찰서가 연이어 창설됐는데 주로 인구 집중이 높았던 서울(144만6천19명), 부산(47만3천619명), 대구(31만3천705명), 인천(26만5천769명)을 중심으로 설치됐다. 그러나 1957년 7월 각 시도 경찰국 보안과 내 여경계로 여자경찰이 재배치되면서 일반경찰서와 관할이 중복된다는 이유 등으로 11년 만에 여자경찰서는 폐지됐다.
인천의 권번은 초기 설립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지만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전후 상황은 추정해볼 수 있다. 즉, 1909년 조선의 관기제도가 폐지된 이후 ‘용동기생조합소’에서 출발한 ‘용동권번’은 ‘소성예기권번’ 등으로도 불리다가 1930년대 중반 ‘인화권번’ 그리고 ‘인천권번’ 등 명칭을 달리하면서 인천 경제의 성쇠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해 갔다.인천 옛 향토사가의 글에 "인천 기생의 수준은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을종 ’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 직업적인 기생을 길러 내던 교육기관이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고 활동하던 기생조합(妓生組合)의 일본식 명칭이다. 당시 기생의 직업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제였기 때문에 모든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을 둬야만 활동할 수 있었다. 권번은 유곽(遊廓)의 창기(娼妓)와 달리 예인(藝人)으로서 소리와 악기, 춤에 능한 명기(名妓)를 배출했던 곳으로 구분된다.권번의 직접적인 뿌리는 조선의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지방 향기(鄕妓)와 서울 관기(官妓) 출신의 경기(京妓)들이 모여서 1909년 처음으로 만든 한성기생조합소(漢城妓
유사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출산과 양육은 여성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고대사회에서도 여성은 지모신(地母神), 신모(神母), 다산(多産) 등 생산의 상징, 자녀의 출산과 양육,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점차 사회가 발전하면서 양육 방식도 다양해졌는데, 특히 부모가 자녀의 출생부터 성장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육아일기’는 무엇보다 소중한 유산이자 역사적 자산이다.그런 관점에서 인천 여성이 남긴 소중한 기록이 있다. 인천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최선화·양우조 부부의 육아일기인 「제시의 일
용유도 옆에 있는 섬 무의도는 잠진항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2019년 4월 잠진도와 무의도를 연결하는 무의대교가 생겨 이제 배가 없어도 육지에서 언제든지 건너 다닐 수 있는 ‘섬 아닌 섬’이 됐다. 하나께, 큰무리, 실미 등의 해수욕장을 갖고 있는 이 섬은 흔히 "섬의 모양이 장수(將帥)가 관복(冠服=衣)을 입고 춤을 추는(舞) 모습"이어서 ‘무의(舞衣)’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반을 통해 무의도는 ‘옷(衣)’을 입고 ‘춤추는 (舞)섬’이 아니라 ‘옷(衣)’을 ‘입지 않은(無
개천절은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다. 그러나 ‘개천’의 본래 뜻은 단군조선의 건국일이라기보다는 환웅(桓雄)이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BC. 2457년(上元 甲子年) 음력 10월 3일이다. 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한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부르며 제천행사를 치렀는데, 개천의 핵심은 제천의식이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고조선 멸망 후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