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용어가 있다.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이는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당하는 사람을 혼란에 빠트리고, 급기야는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없어 가해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행태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1938년 연극 ‘가스라이트(gas light)’에서 유래됐다. 오늘은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한 1944년 영화 ‘가스등’을 소개한다.부모를 잃고 이모와 함께 살아가던 폴라는 청소년기에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다. 유명 오페라 가수인 이모 앨리스 엘퀴스트가 자택에서 살해된 것이다. 이에 폴라는 런던을 벗어나 이탈리
장미처럼 붉고 화려한 꽃이 있는가 하면 단아하고 청순한 매력의 이름 모를 꽃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를 결정하는 것은 취향에 따라 갈릴 뿐 정답은 없다. 어떤 꽃이건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오즈 야스지로의1958년작 ‘피안화’는 두 부류의 꽃 중 후자를 닮은 작품이다. 드라마틱한 갈등 구조도 약하고 스펙터클한 볼거리로 중무장한 영화도 아니다. 카메라는 정적으로 대상을 비추고 화면을 채운 공간은 집 안, 회사, 식당, 기차역 등 일상의 장소들이다. 오락용 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오즈 감독의 영화는 특유의 차분하고 정갈한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코세이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유명 감독들이 한결같은 존경을 표하는 감독이 있다. ‘우리 시대의 셰익스피어’, ‘진정한 거인’으로 칭송되는 이 사람은 ‘세기의 아시아인’으로도 선정된 일본 영화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다. 영화 ‘라쇼몽(1950)’의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을 계기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독특한 서사 전개와 생동감 있는 화면 구성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후대 영화인에게 귀감이 됐다. 뿐만 아니라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는 휴머니즘적
연애 편지를 쓸 때 그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어쩐지 상투적이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단어만으론 감정을 오롯이 전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흔히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소중한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시(詩)가 탄생한다. 유명한 작가나 대단한 문장가가 아니더라도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사랑에 빠지기 위해, 더 정확히는 이성의 호감을 사기 위해 시인이 되고 싶은 남자가 있다. 순박한 시골 총각 마리오는 여성 팬이 많은 시인 네루다를 보며 시
배우, 감독, 각본가, 성우, 제작자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한 오손 웰스는 천재로 정평이 나 있다. 하나만 잘해도 충분할 것을, 그는 도전한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190㎝에 가까운 장신에 당당한 풍채, 중후한 목소리와 개성적인 외모의 웰스를 영화에서 보면 카리스마에 압도된다. 그래서일까? 영화 ‘제3의 사나이’는 오손 웰스 주연 작품이라는 오해를 받곤 한다. 그의 등장은 고작 10분에 불과한데 말이다. ‘제3의 사나이’는 2차 대전 후 이데올로기로 양분된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 전개되는 범죄 누아르 영화로 조셉 거튼
느닷없이 찾아오는 옛사랑의 기억이 있다. 머릿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까맣게 잊고 있던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감정, 그때 그 사람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여운이 긴 꼬리처럼 잔향을 남긴다. 한동안은 문득문득 쓸쓸함이 남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잊혀지게 마련이다. 1961년 개봉한 영화 ‘이수’는 그런 감정을 파고드는 작품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돌이킬 수 없는 선택.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움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다. ‘이별의 슬픔’을 뜻하는 영화 ‘이수(離愁)’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
인간은 다급한 상황에서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평소 인류애 넘치는 소신을 밝히고 시의적절히 사회를 비판하며 뼈아픈 촌철살인을 설파하던 사람이라도 말과 행동은 다를 수 있다. ‘나이브스 아웃’은 유산 상속 해프닝을 그린 영화로, 당연히 거금을 상속받을 거라 생각한 자손들이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보여 주는 인간의 이중성을 유머러스하지만 날카롭게 고발한 작품이다. 2019년 올해의 10대 영화로 선정될 만큼 당시 큰 관심을 받은 이 작품은 화려한 올스타 캐스팅과 함께 오랜만에 만난 정통 추리극이란 측면에서 관객과 평단의 찬사
한 해, 두 해, 세월이 유수 같이 흐른다. 평소에는 체감하지 못하는 세월의 무게는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질 때, 달력을 새로 걸거나 다음 장으로 넘길 때,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났을 때 유독 크게 다가온다. 그럴 때면 시간을 잡아 두거나 뒤로 돌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오늘 소개하는 영화는 전 인류가 꿈꾸는 ‘청춘을 유지하는 명약’에 관한 작품이다. 1952년 개봉한 ‘몽키 비즈니스’는 불로장생을 실현할 신약을 개발하는 한 연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허무맹랑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1세대 할리우드 명감독 하워드 혹스와 명배우
1990년대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집에 장식된 영화 포스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우표 수집처럼 영화 포스터를 모으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20세기의 마지막 몇 년을 앞둔 그 시기, 영화의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포스터는 유달리 감각적이고 아름다웠다. 당시 인기 있던 포스터 중 하나가 바로 1993년도 영화 ‘피아노’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황량한 해변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피아노 한 대와 그 곁을 지키는 모녀. 쓸쓸한 분위기와 함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영화의 섬세한 선율에 귀 기울여 보자.19세기 말, 귀족 출신의 2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왕을 선택하라면 단연 세종대왕이 압도적일 것이다. 바다 건너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인이 사랑하는 왕은 누가 있을까? 유명한 왕으로는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을 꼽을 수 있다. 그에 반해 헨리 5세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즉위 기간도 9년으로 길지 않았던 헨리 5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성공적인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군사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도 프랑스 군을 압도적으로 제압한 아쟁쿠르 전투의 승리가 유명하다. 공영방송 BBC가 2002년 여론조사로 선정한 위대한 영국인 100인
일인자들끼리 함께 작업을 하면 최상의 결과물이 나올 것 같지만 실상은 협업 자체를 보기 어렵다. 양자 모두 자신의 스타일이 워낙 확고하다 보니 융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어떨까?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남녀 배우를 단 한 명씩만 선정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성, 흥행성, 연기력 모두에서 높은 성취를 보인 배우들이 있다. 미국 영화연구소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배우는 바로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햅번이다. 이름만으로도 이견 없이 수긍이 가는 두 사람이다. 이 최고의 배우들이 1951년에 뭉친 한
지난해 우리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수상했을 때 1955년작 ‘마티’가 여러 언론에서 함께 언급된 바 있다. 이는 아카데미 작품상과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동시 석권이라는 보기 드문 이력 때문이다. 영화 ‘마티’는 TV드라마를 영화로 각색한 작품으로, 주말 동안 주인공 마티에게 벌어지는 짤막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시상식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만큼 철학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주제의식을 표명한 작품이라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마티’는 뜻밖에도 담백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물이다.이탈리
2020년이 저물어 간다. 오늘은 그 마지막 수요일이다. 올 한 해는 전 인류에게 참으로 낯설고 힘든 시간이었다. 어두운 터널처럼 길었던 날들도 돌아보니 벌써 일 년이 됐다. 더디고 느린 것 같던 2020년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는 너나 할 것 없이 외부 활동이 제한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가까운 사이라 허물이 없고, 그런 까닭에 지나치게 편하게 대하거나 혹은 이기적으로 행동해 다툼이 생겼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올해처럼 가족과 주변의 안녕을 챙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배우. 진부한 표현이지만 배우 브래드 피트의 등장이 그랬다. 1991년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풋풋한 청년으로 짧게 출연한 이 남성을 누구도 지나칠 수 없었다. 1990년대 아이콘이자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성’이란 수식어를 달고 다닌 그는 언제나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었다. 여느 미남 스타들이 그렇듯 피트도 연기보다는 외모가 앞서 주목받곤 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은 꽃미남 청춘 스타 이상의 가능성을 알린 중요한 초기 필모그래피로 꼽힌다.20세기 초 미국 북서부 시골마을 목사인 맥클레인
손에 든 유리구슬 안에서 하얀 종이가 눈송이처럼 날린다. 영화 ‘맹크(2020)’의 포스터를 보고 자연스레 영화 ‘시민 케인(1941)’의 오프닝이 떠올랐다면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올해 11월 개봉한 ‘맹크’는 79년 전 세상에 나온 영화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 창작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시민 케인’은 1997년, 2007년 미국 영화연구(AFI)가 선정한 100편의 영화 중 1위에 오른 작품이자 2015년 영국 BBC가 선정한 100대 미국 영화에서도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세기의 명작이다. 촬영과 편집에 있어서도 놀라운 완
대중문화 속 탐정의 모습은 두 개의 캐릭터로 양분된다. 큰 키에 다소 마른 체격, 사냥 모자와 망토 코트, 파이프 담배와 돋보기로 대표되는 탐정 셜록 홈즈는 전체적으로 날카롭고 예민한 오라를 풍긴다. 귀족적이고 클래식한 이미지의 홈즈와는 달리 평범한 듯 보이지만 묵직한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탐정도 있다. 줄담배, 중절모, 트렌치코트, 리볼버 권총으로 연상되는 이 인물은 다부진 체격과 선이 굵은 마스크 등 거친 남성의 느낌이 강하다. 홈즈가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탐정 캐릭터라면 후자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대명사다. 누아르 영화 속 탐정의
어린 시절 일기를 읽다 보면 박장대소할 만한 에피소드는 없어도 읽는 내내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기록에는 사소한 희로애락이 가득하다. 소시지 반찬 하나로 행복해하고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연속으로 진 것이 속상하기만 하다. 소소하고 때론 실없는 농담으로 가득한 유년 시절의 그림일기는 순수한 마음, 단순한 행복의 의미를 일깨운다. 1959년작 영화 ‘안녕하세요’는 어린 시절에 쓴 일기장 같은 작품이다.높고 푸른 하늘 아래 주택단지가 펼쳐져 있다. 마당도 없이 오밀조밀하게 마주하는 집은 마을 사람 누구에게나 문
사랑스러움의 대명사이자 만인의 여인인 오드리헵번과 스파이 스릴러 영화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뮤지컬 코미디의 대가인 스탠리 도넌 감독이 헵번을 주인공으로 첩보 영화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이전 필모그래피는 ‘로마의 휴일’(1953),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사랑은 비를 타고’(1952), ‘퍼니 페이스’(1957)로 충분히 성공적이다. 로맨틱 코미디와 뮤지컬 코미디를 통해 성공적으로 대중과 교감하던 배우와 감독이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 작품이 바로 ‘샤레이드’(1963)다. 가식, 위장이라는
영화의 서사는 주로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다룬다. 밥 먹고, 일하고, 동료와 술 한 잔 기울이고, 집에 돌아와 목욕하고, 잠자는 일상의 반복은 우리 삶과 같기 때문에 굳이 영화로 만들 필요가 없어 보인다. 설령 그런 영화가 있다 하더라도 볼만한 재미가 있을지 의문마저 든다. 그러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을 영화로 포착한 감독이 있다. 취업, 결혼, 부모를 모시는 일을 소재로 평이하게 펼쳐지는 특별할 것 없는 홈 드라마를 통해 삶의 진리를 포착해 내는 비범한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세계다. ‘가을 햇살’
1999년 12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는 ‘밀레니엄 버그’ 공포에 휩싸였다. 컴퓨터가 연도의 끝 두 자리만 인식하기 때문에 2000년과 1900년을 구분하지 못해 일대 혼란에 빠질 거라는 예측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시스템 오류로 핵미사일이 발사될 수도 있다는 끔찍한 보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사전에 잘 대처한 결과 21세기는 별 탈 없이 시작됐다. 이처럼 세기말에는 새 시대를 여는 기대와 함께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공존한다. 1899년에서 1900년으로 넘어가던 120년 전 유럽 사회도 그랬다. 과학기술의 발달,